개복치 마케터의 사회생활
작성일: 2019.03
“너는 뒤에서 누가 툭툭 치면 깜짝 놀라서 기절할 애야.”
예전에 사주를 봤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. 너무 나 같아서 웃겼다. 그때 들은 말대로 나는 집에서 가구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고, 길에서 갑자기 까만 비닐봉지가 굴러와도 쥐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란다. 매년 내 새해 목표에는 ‘일희일비하지 않기’라는 말이 있었다.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말을 적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내가 예민하고 심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. 한 때 유행했던 게임의 개복치처럼 작은 이유 하나에 거품 물고 게임 오버가 되는 사람, 그 게임 스토리처럼 그 이유도 황당하기 그지없고 다양한 사람이 나다.
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성향 때문에 조직생활을 오래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. 그저 2-3년 일하고 외국으로 훌쩍 떠나야지 생각하며 시작한 회사 생활이었다. 대기업 원서도 하나도 쓰지 않았다. 연수원 생활이 싫다는 이유였다. 개복치는 단체 생활도 싫어한다.
정신을 차려보니 마케터가 된 지 만으로 7년, 연차로 9년이 되었다. 가끔씩 ‘아니 어떻게 개복치가 이렇게 오래 회사에 다닐 수 있지?’ 하는 놀라움으로 나를 돌아본다.(심지어 꽤 잘 다닌 편이라 생각한다.) 개발자가 단답으로만 대답해도 상처 입는 사람이 이렇게 조직생활을 오래 하다니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다.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개복치 성향이 점차 나아져서 무뎌지더라,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이다. 예쁜 해피엔딩이니까. 안타깝지만 아직도 나는 모르는 회사 사람에게 메신저를 할 때면 마음이 두근두근하다.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.
돌이켜 보면 개복치가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‘세상은 순리대로 흐른다’라는 명제를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. 내 앞에서 나를 시기하면서 대놓고 욕했던 사람, 직급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마음대로 하던 상사, 개인의 적성은 신경 쓰지 않는 조직개편, ‘삶은 드라마보다 막장이다’라는 걸 깨닫게 되는 정치 싸움 등 개복치의 멘탈이 무너지는 일들이 숱하게 있었다. 때로는 잠 한숨 못 자기도 하고,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펑펑 운 적도 있고,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아버리기도 했다. 그러나 돌이켜보면 장기적으로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간다.
내가 나를 다잡을 때,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.
1) 피터의 법칙: 인간은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는 법칙.
: 자신의 무능력함이 드러날 때까지 승진하는 것이 조직의 생리. 내 조직장은 높은 확률로 멍청할 수밖에 없다. 그리고 자신의 능력보다 한 단계 더 승진하게 된다. 그러니 우리 조직장이 멍청하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. 다른 조직도 비슷비슷하다.
2)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.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. (노자의 말)
: 굳이 복수할 필요가 없다. 나한테 잘못했던 사람은 곧 더 큰 잘못을 저지를 테고 스스로 패망한다.
3)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은 관념이다. (태도에 관하여, 임경선)
: 내 삶이 항상 흔들리고, 이번 고비가 지나면 다음 고비가 올 거라는 생각에 삶에 초연해지게 된다.
4) 차분한 성격에 의외로 대담한 성격을 가진 학생으로 예의 바르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스스로 계획적으로 처리하며 매사에 신중한 자세가 매우 보기 좋은 학생임.
: 고3 담임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써주신 말. 수시모집, 수능이 다 끝난 뒤어서 생활기록부를 확인하지 않이서 뒤늦게 이 말을 발견했다. 스스로 자책할 때마다 이 글을 본다. 선생님이 봐준 나처럼 살아가기 위해. 사소한 것에는 개복치여도 큰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대담한 사람이라 나를 믿으려고 한다.
운이 좋게도 나는 한 회사 대표님의 직속 팀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. 20년 이상 한 기업을 이끌어온 대표님을 비롯해 우리 회사, 다른 회사 임원 등 높은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었다. 그리고 배웠다. 대표님이든 유명인사든 누구나 다 외롭고 흔들린다.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. 결국 모든 일은 돌고 돌아 순리대로 돌아온다.
또 하나의 희망, 개복치가 죽으면 게임은 리셋될 뿐 다시 시작할 수 있다.
이런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또 버텼다.
조금 커서 보니 입장이 달라지거나 첨언을 하고 싶은 말도 있지만 그대로 올려본다.
특히, ‘피터의 법칙’ 같은 경우에는 더 적확하고 발전된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, 그 글을 조만간 써 보겠다.